2019년의 첫 3개월 동안 힘들게 살았다 보니 나에게 보상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즉흥적으로, 별 다른 계획없이 싱가포르에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2019/03/30 - [퇴사+방콕] - 세상이 핑핑 도는 무서운 병 (이석증과 전정신경염, 바이러스성 내이염)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보니 기대도 없었다. 알고 있었던 거라곤 “깨끗한 나라”, “쓰레기 버리면 벌금이 어마어마 한 나라” 라는 것 뿐.
친구가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비행기 티켓을 출발 전날밤 바로 구매했다.
싱가포르에서 방콕 왕복은 10만원에도 살 수 있으나, 방콕에서 싱가포르 왕복은 그렇게 저렴하게 구매하는 것은 어렵다. 최소 16만원은 필요하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싱가포르. 태국도 그랩 이용이 쉬운데, 싱가포르는 더더욱 잘 되어 있어서 그랩으로 시내에 진입. 나라 자체가 작다보니 시내까지 가는데 얼마 나오지 않는다. 그랩기사도 너무나 친절하고, 처음 온다니 이것저것 묻지도 않은 얘기를 술술 해 주어서 가 볼 만한 곳의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펼쳐지는 싱그러운 나무들의 행렬과 새파란 하늘, 어느 곳 하나 허름한 군데없이 잘 정비된 도로. 아무런 기대 없이 온 싱가포르가 갑자기 확 좋아지는 순간이다.
도착한 숙소도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시내 중심과는 조금 떨어진 조용한 주택가인 Alexandra Village라는 곳에 위치한 곳이다. 아파트가 아닌 2층집에 한 방을 빌렸더니 번잡한 시내의 소음이 아니라 나무와 새 소리가 들려서 참 좋다.
도시 곳곳마다 버스와 전철이 안 지나는 곳이 없어 교통이 너무나 편리했고, 구글맵으로 길을 검색하면 어느 버스를 타서 어디서 내려야 하는 지 다 나오기 때문에 길 잃을 염려가 없었다. 길을 잃더라도 어디든 길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니 걱정이 안 되더라. 하지만 혹시라도 걱정된다면 꼭 구글맵을 보고 현재 어디쯤 지나고 있는 지 확인하는 게 좋다. 버스에 따라 멈추는 정거장 이름이 나오기도 안 나오기도 한다.
길이 울퉁불퉁한 방콕을 벗어나 잘 닦인 도로를 걸어 다니니 마음이 평안해지고 세상이 절로 아름답게 보인다.
태국에서는 사람들이 빤히 혹은 곁눈질로 쳐다보는 게 있었는데, 이 곳엔 중국인이 많다보니 전혀 이질감없이 이들과 섞일 수 있어서 좋다. 우선 말이 통하는 나라에 오니까 그냥 내가 사는 동네처럼 활보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오쯤 도착했으니 아직 반나절이 남은 셈이다. 먼저 커피를 마셔서 졸음을 떨치기 위해 근처(Tiong bahru)의 평이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와우!” 이렇게 커피가 맛있을 줄이야. 4일간 매일 다른 곳에서 커피를 마셨지만 어딜 가나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어 싱가포르 여행이 더 즐거웠다. 방콕에서는 간혹 실패할 확률도 꽤 되기 때문에. . .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간 곳은 보태닉 가든(Singapore Botanic Gardens).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된 공원. 워낙에 방콕에서 자연을 느끼기가 힘들기 때문에 바로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새벽 5시부터 자정까지 무료로 개방한다. (너무 놀람!!)
도시 전체에 나무가 참 많아 눈이 아주 행복했다. 알고보니 나라에서 법적으로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 베어진 나무 수 만큼 새로운 나무를 심을 것을 규제해 두었다고 한다. 아주 아주 칭찬해 마땅한 정책이다.
보태닉 가든은 그 규모와 테마를 고려해 봤을 때 무료로 운영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관리되고 있다. 3시 이후에 오니 날씨도 선선하고, 나무가 만들어주는 공기는 다른 지역의 것과 확연히 차이가 있다. 아름다운 정원에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 강아지와 산책하는 가족이 한 데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평일에 다시 찾은 보태닉 가든은 주말과는 판이하게 한산하다. 사람을 눈씻고 찾아야 할 정도인데, 어디든 누워서 명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다. 마음의 안식을 주는 곳이니, 싱가포르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방문을 추천하고 싶다.
싱가포르에는 곳곳에 규제 간판이 많이 있다. 보태닉 가든에도 여러가지 규제 안내 표지를 보았는데 볼 때마다 웃기다. 하나씩 새로운 규제 아이템이 생길 때마다 표지도 새로 만들어서 덕지덕지 안내판이 모여있기도 하는데,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싱가포르는 중국인, 인도인, 말레이시아인의 세 인종이 융화되어 살고 있는 나라다보니 언어도 영어 이외에 세 나라 언어를 공용어로 지정해 두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안내문은 4개의 언어가 병기되어 있어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방콕에 살다보니 싱가포르에 가면 높은 물가에 깜짝 놀랄 거라는 생각을 했으나, 생각보다 물가가 그렇게 높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당연히 호텔 비용은 너무 비싸긴 했으나, 음식값을 줄일 수 있는 Hawker Centre 라는 푸드센터가 있는데, 단돈 2천원 정도로 여러가지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는 푸트코드가 도시 곳곳에 있기 때문에 음식값을 세이브 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아침에는 야쿤카야토스트 집에 가 보았다.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본고장에서 먹으면 더욱 맛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갔으나 너무 달고 느끼해서 실망했다. 게다가 같이 나온 커피도 설탕이 자동 첨가되어 있었는데, 이가 아플 정도로 단 커피여서 마시지 못했다.
낮에는 무료로 개방하는 국립도서관(National Library)에 갔는데, 책 관리가 조금 부실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았고 도서 연식도 오래되어 보였다. 아마 기부 받는 책들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도서관 자체는 굉장히 크고, 여러가지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어 찾는 사람이 많았다. 또 시원한 실내에서 편안한 소파에 앉아 무료 와이파이를 즐길 수 있다보니 나처럼 여행하는 사람이 들르기에도 좋은 것 같았다. 실제로 자는 사람도 많다. 꺽꺽 트름하며 돌아다니거나 큰 소리로 얘기하는 중국 아저씨도 있지만 대부분 예의를 지키며 책을 읽고 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이들은 평일 낮에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걸까?
점심은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먹어보고 싶었던 바쿠테 (Bak kuh teh). 굉장히 맛있고 부드러운 고기 질감에 깜짝 놀랐다. 얼마간 아팠던 지라 맑은 국물을 들이킨다. 보양하는 느낌이 나고 좋다. 좋아하는 중국식 두부 요리, 막창요리도 사이드로 시킬 수 있는데, 혼자서 먹기 좋은 양이어서 부담없이 시킬 수 있다. 테이블이 대부분 좁은 2인용 식탁이기 때문에 혼자 가도 큰 테이블을 차지하지 않아 눈치보이지 않는다. 혼자 와서 먹는 사람도 많다.
3월에도 해가 너무나 쨍쨍해서 따가울 정도의 더위. 금방 지쳐버리기 일쑤라 오랫동안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다.
밥을 먹고 돌아다니다 보니 만나게 된 동네 Tanjong Pagar. 사원과 작은 골목들이 자꾸 걷게 만든다. 바다 근처에 있는 곳인데, 처음에 정착한 사람들은 우유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국 식당도 꽤 있고, 아기자기한 식당과 펍이 많다. 예쁜 카페에 들어앉아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었다. TIP : Tanjong Pagar 에서 106번 버스 타면 싱가폴 보태닉 가든을 가는데, 가든스바이더 베이, 마리나 베이샌즈, 오차드 스트릿을 거쳐서 갈 수 있어서 관광버스로 이용하면 딱 좋다.
싱가포르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보니 역사, 문화, 정치 등에 대해서 알아보기도 했는데, 신기한 것이 참 많았다. 교육열이 대단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좋은 학교를 진학하지 않으면 이미 그 학생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라고 하는 것. 말레이시아의 한 도시였으나, 강제로 독립을 당했고, 독립을 당하면서 굉장히 슬퍼했다는 것. 건물 디자인이 모두 다 다르고 특색있는데, 이는 나라에서 같은 디자인의 건물은 건축허가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등.
싱가포르의 밤은 한낮의 뜨거웠던 열기가 사라지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 걷기에 좋다. Bugis의 Arab Street에 가보자. Masjid Sultan 모스크가 있는 곳인데, 때때로 기도소리가 들려와 처음 들었을 땐 무섭기도 했지만 밤에 빛나는 사원 건물은 골목마다 아기자기한 샵에 볼거리가 가득하다.
밤에는 야외 펍에 사람들이 모여 한잔씩 하는데, 골목 이곳저곳에 펍에서 고용한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 그 중 정말 노래를 잘 하는 가수가 있어서 오랜만의 수준급의 버스킹을 보는 느낌이라 더 듣고 싶었다. 그 가수가 노래하는 인도 식당에서 히말라야 어쩌구 차를 마셨다.
작은 나라다 보니 갑갑한 느낌이 들어 오래 살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는 동안 불편함 없이 높은 삶의 질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자연이 싱그럽고 정부가 일을 하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5년을 싱가포르에 살면서도 이번에 처음 보태닉 가든을 가 봤다고 한다. 문득 내 모습을 돌아본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즐기고 나서 다른 것과 비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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